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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령이 없는 세계 AU

   쇼코. 조금 갑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나 최근 이상한 남자 두 명에게 쫓기고 있어. 착각이 아니라 정말이야. 신고할까 생각해봤는데 알다시피 이런 건 대부분 경찰 쪽에서 쉬쉬하잖아. 무엇보다 날 쫓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위치가 높은 그런 분들이라... 신고한다고 해도 제대로 들어갈지 모르겠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지마는, 불안해서 네게만 전해. 혹시 내가 갑자기 연락이 없다면 경찰에 신고 부탁할게.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이에이리 쇼코에게 한참을 고민하다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때마침 깨어있었는지 금방 숫자 1이 지워졌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로부터 알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띵동. 안심하기 무섭게 초인종이 울린다. 이불을 둘러쓴 채 침대에 앉아 숨을 죽였다.

 

   “집에 있니? 밥은 잘 먹고 있고? 점심으로 소바를 해봤는데 꼭 너랑 같이 먹고 싶어.”

   “아키사. 말하기 곤란한 일이 있다면 문자라도 보내줘. 회사에는 네가 아파서 못 오고 있다고 둘러댔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마음 같아서는 그만하라고 소리지르고 싶었으나 내가 집에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다. 저 둘은 한참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울리다 같은 층 입주자의 불평을 들은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안에 있는 거 아니까 연락은 받아줘.’ 잠잠해지기 무섭게 도착한 문자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휴대전화를 꺼버렸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법한 유명 배우와 대기업의 자제분께서 내게 관심을 가지는 상황은 처음에는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아 두근두근했다. 하지만 저런 거물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평범한 사람에게 흥미를 보일 리가 없다. 도박에 미친 아버지가 드디어 나를 팔아넘긴 건가? 이게 현대 사회에서 가능하나? 여러 가정을 떠올리며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논하려면 우선 한 달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

 

 

 

   귀청이 떨어질 만큼 매미의 울음이 기승부리는 어느 더운 여름날이었다. 더위에 유달리 약했던 나는 폭염이 연달아 이어지는 날이면 필요 이상의 외출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쁘게도 올해 꿈에 그리던 회사에 합격했다. 코흘리개도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대기업이다. 그리고 입사한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만에 성과를 내어 나의 능력과 노고를 인정받았다. 보너스를 받자마자 곧바로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10시가 넘는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

 

   더위가 절정에 다다르면 이상하게도 이유 없는 불안감을 느꼈던 나에게 이 계절은 징크스나 다름없다. 이번에는 제발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다며 매번 기도하는 계절에 이런 기쁜 소식을 연달아 듣다니! 알딸딸해진 상태로 해죽해죽 웃으며 집으로 향했다.

 

   “조금 취했나....”

 

   사실은 많이 취했다. 하지만 주정뱅이들이 그렇듯 ‘나가스기 씨 혹시 취했어요?’라고 물으면 반사적으로 취하지 않았다고 반박하게 된다. 부축해주겠다는 친구의 권유를 뿌리치고 나왔는데 아무래도 자존심을 굽히고 취했다고 양심고백 했어야 했다.

 

   편의점에 들어가 숙취 해소제와 유명 배우가 모델인 술을 하나 구입했다. 어차피 내일은 휴일이니 더 취하고 싶었다. 숙취 해소제를 단번에 입에 털어 넣자마자 검은 그림자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아가씨. 예쁘네. 혼자야?”

 

   썩 좋지 못할 부류의 남자들이 킬킬 웃으며 나를 내려다본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거리에 사람은 별로 없다. 알코올에 잠식되어 있던 뇌가 주인의 위험을 감지하고는 이성을 되찾았지만 이미 늦었다.

 

   “비켜주세요.”

   “싫다면?”

 

   양아치들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숙인다. 내가 이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비명을 질러야 하나? 휴대폰으로 몰래 경찰에 연락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찰나에 사이로 덩치 큰 장신의 남자가 비집고 들어왔다. 의문의 남성은 고개를 한참은 꺾어야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키가 엄청 컸고,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얼핏 봐도 미남이다. 눈이 마주 친 흑발의 남자는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디선가 본 얼굴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내 여자친구한테 무슨 볼일 있어?”

 

   세상일이라는 건 참 불공평하고 불합리하다. 성별이든 몸집이든 상대적으로 약해보이는 사람에게는 무리지어 위협하면서 저보다 강한 사람이 등장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물러서니 말이다. 불한당들은 삽시간에 꼬리를 내리고 그냥 취한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했다는 어설픈 변명과 함께 사라졌다.

 

   “괜찮아?”

   “감사합니다. 저기... 이제 이 팔은 풀어도 되지 않을까요?”

 

   남자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더 힘을 줬다. 미친놈들이 갔더니 더한 미친놈이 나타난 게 아닐까. 내가 그를 밀쳐내자 눈에 띄게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누구인지 정말 기억이 나지 않니? 아,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

 

   주변을 살피고는 마스크를 살짝 내린다. 오뚝한 콧대와 여우나 뱀을 연상시키는 눈매. 걷어진 소매 사이로 보이는 팔뚝은 위협적일 만큼 단단해보였다. 주변이 어두워 몰랐는데 귓불이 박힌 새카만 귀걸이는 주로 불량배들이나 착용하는 물건이다. 순간 겁을 먹었으나 나를 내려다보는 따스한 눈빛에 안심했다.

 

   “어?”

 

   들고 있던 술병 겉면에 붙여진 스티커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흑발의 모델이 정중한 자세로 술을 따르는 시늉을 하고 있다. 나는 이 모델과 눈앞의 남성을 비교했다.

 

   “혹시... 게토 스구루?”

 

   게토 스구루. 연예계에 관심이 없는 내가 알음알음 알 정도로 유명한 배우다. 어렸을 때 길거리 캐스팅을 당해 모델로 시작해 현재는 배우까지 손을 뻗었다는데 얼굴, 몸매, 연기 삼박자가 모두 완벽한지라 현재는 명실상부 업계의 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행이다. 너도 전부 기억해냈구나.”

 

   남자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기억해 냈구나가 아니라 나를 알고 있구나가 더 맞지 않나? 다소 뒤끝이 찜찜한 대답이었지만 머리가 아찔해질 만큼 더운 열대야에 말이 잘못 나왔을 거라고 가벼이 넘겼다.

 

   “당연하죠. 유명한 배우시잖아요.”

 

   그러자 마스크를 다시 쓰던 게토가 슬픈 듯 눈을 다소 내리깔았다. 나를 응시하는 눈동자는 소주병에 인쇄된 쾌활한 모델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애수에 젖었다. 돌연 심장이 아릿해졌다. 이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마치 되돌아갈 수 없는 추억을 떠올린 것처럼 기억이 날듯 말듯 가슴이 먹먹해져서 이대로 긴장을 풀어버리면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래. 나 엄청 유명하지. 이곳의 사람들이 전부 나를 알 수 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일했어.”

   “왜요?”

   “찾고 싶은 사람이 있었거든. 그런데 어디에 있는지 몰라. 내가 유명해지면 그쪽에서 날 찾아와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모델 일을 시작했지.”

   “그 사람은 당신을 찾아갔나요?”

   “몇 명은 찾아왔는데, 꼭 보고 싶은 사람은 오지 않았네.”

 

   나를 쥔 그의 손에 더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수묵화처럼 처연한 느낌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꽉 껴안아 언젠가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외칠 뻔했다.

 

   “집은 어디니? 바래다주고 싶어.”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손을 놓아주고 미안한지 멋쩍게 웃는다. 외모와는 다르게 굉장히 다정하고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다.

 

   “딱 잘라서 말하자면 부담스러워요. 혼자 갈게요.”

   “내일 뉴스에 술에 취한 20대 여성이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잠자리가 한동안 뒤숭숭해질 것 같아서 그래.”

 

   여기 치안 나름 괜찮은 편인데요. 라고 말하기에는 불과 5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더는 거절할 수 없다. 적당히 근처까지 갔다가 헤어지면 괜찮겠지. 대대적으로 얼굴이 팔린 남자가 내게 범죄를 저지를 것 같진 않다.

 

   편의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15분 남짓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게토 스구루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가족은 어떤지 호구조사를 하듯이 집요하게 캐물었다. 보통이라면 적당히 어물쩍 넘겼겠으나 보기 드문 미남이 내게 호의적인 어투로 조곤조곤하게 물으니 정신 차리고 나면 그가 바라는 대로 착실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내내 그의 페이스에 휘말렸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너와 만나서 기뻤어.”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어 내 손에 쥐여준다.

 

   “이거 내 개인 폰으로 연결되는 번호야. 불편하다면 이대로 버려도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연락해줬으면 좋겠네.”

   “개, 개인 폰이요?”

 

   유명배우가 우연히 만난 일반인에게 번호를 건넬 확률은 몇 퍼센트나 될까. 거기에 업무용인 아닌 개인용 번호라고 한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내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착각하게 된다. 두 볼이 뜨뜻하게 데워지는 게 느껴진다. 저 남자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덥니?’라며 자연스럽게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조심히 들어가.”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큼지막한 손을 흔들어 나를 배웅했다.

 

   “또 만나자. 아키사.”

 

   그는 내가 아파트의 현관에 들어설 때까지 지켜보았다. 다정함이 죄가 된다면 저 남자는 필히 유죄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을까.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맞다. 사진 찍어달라고 할 걸. 하다못해 사인이라도 받았어야 했는데! 뒤늦게 서야 후회가 밀려들어온다. 다시 그에게 가 사진 좀 찍어달라고 하는 건 부끄럽다. 아쉬움에 터덜터덜 엘리베이터를 탔다. 또 만날 수 있을까.

 

   이름을 말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건 침대에 누워 그와의 비현실적인 만남을 복기했을 때였다.

 

 

*

 

 

   “아키사. 우리 점심에 디저트 카페 가자.”

   “죄송하지만 다이어트 중이라 달달한 음식은 피하고 싶어요.”

   “레스토랑은 어때?”

   “죄송하지만 도시락을 싸왔어요.”

   “도시락? 나도 아키사 도시락 먹을래.”

   “죄송하지만 딱 1인분 밖에 없어요.”

 

   고죠 사토루가 밥 한끼 먹기 힘들다고 툴툴거린다. 차기 회장이자 젊은 팀장인 그는 내 직속상사다. 직속상사에게 어떻게 저런 무례한 대답을 할 수 있나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그는 젊은 사람답게 굉장히 오픈 마인드였다. 사소한 것 하나로 예의 없다거나 요즘 젊은이들은 쯧쯧거리며 말꼬리를 잡으며 물고 늘어지는 다른 팀 팀장에 비하면 훨씬 낫다... 고 하고 싶지만 이건 딱 저번 달까지만 해당하는 말이다. 회사는 쓰레기다.

 

   “그럼 네가 준비한 도시락은 내가 먹는 걸로 하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최고급으로 준비해줄게.”

 

   말과는 달리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는 제멋대로 내 점심 메뉴를 선택한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이던가. 두 손으로 세기 어려울 만큼 저 팀장님의 막무가내인 요구에 휩쓸렸다.

 

   남은 일을 처리하는 사이 점심시간이 되고, 주문한 음식이 왔다. 고죠 사토루는 의자에 앉아 있던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공실로 이끌었다.

 

   한창 때의 나이대인 팀장이 부하에게 과하게 관심을 가지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사실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오해를 받기 십상이나 상대가 장난기가 많기로 소문난 고죠 사토루이니 그런 의혹은 생기지도 않았다. 참고로 내가 입사하기 전에는 이지치 씨였다고 한다. 사소한 걸로 부르고 귀찮게 굴었다지. 직장 내 따돌림과는 확실히 결이 다르지만 귀찮은 성격이라는 건 확실하다.

 

   그의 손에 끌려 나가는 나를 모두가 동정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가 된 느낌이다.

 

 

 

   “어때 입에 맞아? 맛있지. 다음에 여기로 갈래? 같이 나오는 튀김이 맛있는데....”

 

   책상 위로 두 개의 도시락이 놓여졌다. 한쪽은 내가 이른 아침부터 준비한 도시락이고 다른 한쪽은 스시가 가득한 도시락이다. 배달에 사용된 상자부터 번지르르한 걸 보아하니 평범한 사람은 감히 거들떠 볼 수도 없는 가격대의 가게일 게 분명하다. 기껏해야 인스턴트식품을 자르고 볶고 넣은 것에 불과한 내 도시락이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고죠 사토루는 뭐가 좋은지 맛있다는 말만 연발했다. 설마 다음에는 더 좋은 음식을 챙겨오라는 고도의 눈치주기인가.

 

   “며칠 전에 연예인 봤다면서? 저번에 이지치랑 대화하는 거 들었어. 왜 나한테는 말 안 해줘?”

 

   그야 당신이랑은 공적인 일들 제외하고 말하기 싫으니까요. 얼굴이 잘생겼든 몸이 좋든 회사 상사로 있는 순간 사적으로 엮이기 싫은 법이다.

 

   “하하, 말하기 부끄러워서요.”

   “내 앞에서는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누구 봤는데?”

   “모델인 게토 스구루요.”

 

   고죠가 설핏 웃는다. 의뭉스러운 태도에 어디 잘못되었나 싶었던 참에 그가 우리 회사의 광고모델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스구루? 정말?”

   “네. TV에서 몇 번 들었긴 했지만 정말 친절하고 다정하시더라구요. 얼굴도 잘생겨서 좋았어요!”

 

   연어 초밥을 우물우물 씹던 나는 유명 배우와의 극적인 만남을 상기했다. 정말 잘생겼지.

 

   “반했어?”

   “예이 설마요.”

   “그렇지? 내가 있는데 그 녀석한테 반할 리가 없지.”

 

   대단한 자신감이었으나 실제로 그는 모델의 뺨을 연달아서 쳐도 될 만큼 완벽했다. 그의 팀으로 배정되었을 때 저 잘생긴 얼굴을 매일 본다면 야근도 행복할 거라고 좋아했다. 초과근무의 욕구와 팀장의 얼굴은 전혀 상관없다는 걸 깨닫게 된 지 오래지만.

 

   그래도 게토 스구루와 같은 다정한 상사라면 야근할 맛이 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사이 고죠 사토루가 내 이마를 가볍게 쳤다.

 

   “설마 날 앞에 두고 그 모델 생각해? 바람은 나빠.”

 

   참고로 나와 저 남자는 절대로 사귀고 있는 사이가 아니다. 나는 적당히 말을 넘기고 참치뱃살 초밥을 씹었다. 비싼 거라 목넘김이 부드럽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밤에 회식이 있다고 했지. 일찍 끝났으면 좋겠는데.

 

 

 

   다행히 회식은 순조롭게 끝났다.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한다든지 다음날에 지장이 생길만큼 붙잡아 귀찮게 구는 타입의 팀장이 아니었던 지라 과거에 다녔던 회사에 비하면 마음 놓고 회식에 참여할 수 있다. 물론 팀장이 자꾸 옆에서 많을 걸며 장난을 쳤지만 술을 강요하거나 새벽까지 달리자는 상사에 비하면 양반이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가스기 씨.”

   “이지치 씨도요.”

 

   가볍게 한잔했던 나와 이지치는 서로 알딸딸한 상태였다.

 

   “아까 팀장님께서 한 잔 하셨는데 괜찮으시겠죠? 술을 잘 못한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원샷을 하실 줄은 몰랐어요.”

   “술을 드셨다고요?”

   “네. 한잔 따라달라고 하시기래 조금 드렸어요.”

   “한잔이라면 괜찮으실 겁니다. 그렇게 높은 도수도 아니었고요.”

 

   이지치는 의외라며 혼잣말하다가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저 혼자 무언가 납득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가 따른 술이라서 마셨다는 건가. 고죠 사토루가 경박하고 장난기가 많은 성격으로 유명하다고 하나 나를 대할 때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었던 것은 느끼고 있었다.

 

   “혹시 저 팀장님께 밉보였나요.”

   “아니!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니에요.”

 

   그가 손사래 치며 부정했다.

 

   “하지만 너무 장난치시는 걸요. 저한테는 더 유별나다고 들었어요.”

   “팀장님은... 그.....”

 

   안쓰러울 만큼 그가 나의 눈치를 보며 한숨을 푹푹 쉰다. 아니면 이 자리에도 없는데 팀장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인가. 그는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참을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나가스기 씨에게 무언가 바라는 점이 있는 게 아닐까요?”

   “바라는 점이요? 제게?”

   “예를 들자면... 떠올려줬으면 하는 거 말입니다.”

 

   아리송한 말이었다. 고죠와 나는 만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다. 이전에 만난 적이 있나 생각해보면 대기업의 자제분과 평범한 내가 회사가 아닌 곳에서 만날 확률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수준이다. 설마, 나 꼭 해야만 했던 업무를 잊어버려서 곤란하게 했던 적이 있던가. 고민해보지만 떠오르는 건 없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며 가볍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난 뒤 이지치와 헤어진 나는 큰 거리에 나와 폰을 켰다. 열대야가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어서 해가 넘어갔음에도 공기는 더웠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에는 분명 안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던 나는 괜히 가슴을 졸였다. 불안함을 삭이며 집으로 가는 버스를 찾던 그 순간, 누군가 나를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아키사!”

 

   시원한 남성향수의 향기 사이로 미약하지만 알코올의 향이 풍겼다. 묵직한 무게감에 중심을 잃고 몸이 비틀거렸다. 다행히 취해있는 와중에도 균형감각은 남아있는지 그가 나를 꽉 안고 바로 섰다.

 

   “위험할 뻔했네....”

   “팀장님 취하셨어요?”

   “아니. 안 취했는데에.”

 

   말끝을 늘어트리며 반쯤 꼬인 목소리로 답하는 게 누가 봐도 취한 이의 그것이었다.

 

   “집에 돌아가실 순 있겠어요?”

   “집? 내 집은 왜? 가고 싶어? 올래? 우리 집에 맛있는 거 많아. 좋아하는 레드벨벳 케이크도 사둘 게. 가자. 응? 갈 거지? 벌써 두근거리네. 내일 토요일이니까 일요일까지 계속 놀까? 게임 좋아해? 아니면....”

   “택시 부를 테니 집 주소 알려주세요.”

 

   내 집이 어디더라, 라며 헤실헤실 웃으면서 늘어진 나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논다. 말도 많아진 걸 보아하니 이 사람 만취했다. 한 잔만으로 만취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내 상사에다가 현재 그를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이 근방에 나밖에 없다는 얄궂은 현실이 미웠다. 길거리가 당신의 집이라며 버리고 갈 수 없는 노릇이다. 나나미나 이지치 등 다른 팀원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받지 않는다.

 

   “팀장님 제 머리는 그만 만지시고 집 주소 알려주세요.”

   “나 집 없어....”

   “아까는 집 있다고 하셨잖아요.”

   “짠! 이제 집 없다.”

 

   방긋방긋 웃고 있는 고죠를 무시하고 계속 연락을 돌려보지만,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된다는 문장만 벌써 스무 번은 들었다. 속 타는 나와 달리 팀장님은 날이 좋다는 말이나 한다.

 

   최악이다. 역시 여름에는 항상 곤란한 일이 생긴다. 고작 한 잔으로 이성을 잃을 만큼 만취한 팀장님을 길거리에 버릴 수는 없고, 도움을 줄 사람들은 바쁜지 연락을 받지 않는다. 여기서 더 늦장을 부렸다간 날이 바뀔 것 같아 그를 내 집에 데려가는 게 최선이라는 걸 깨달았다. 

 

   택시에 그를 태우고 쭉쭉 올라가는 미터기를 바라보았다. 교통비 절감을 위해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택시비 팀장님께 청구할 수 있으려나.

 

 

 

   집으로 가는 약 오십 분의 시간 동안 고죠 사토루는 도통 술이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취하면 주변 사람을 더 귀찮게 구는 스타일이라고 얼핏 듣긴 했으나 말이 많아지고 옆에 있는 사람을 멋대로 껴안는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연인으로 오해한 택시기사가 보기 좋다고 하자 고죠는 나를 여자친구라고 착각했는지 한창 뜨겁다며 혼자 웃어댔다. 아니라고 반박해도 ‘예이. 자기야. 아직도 화났어?’라며 살갑게 말을 붙여올 뿐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뒤 그를 데리고 아파트로 이동하는 도중 문득 이상하리만큼 부축이 쉽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전에 키가 큰 친구를 부축한 적이 있는데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머리 하나는 차이 나는 주제에 어째 쉽다 했더니 비틀거리면서도 내 걸음에 맞춰서 걷고 있다.

 

   “정말 취한 거 맞아요?”

   “으응...? 나 안 취했어. 봐봐 이렇게 걸을 수도 있다니까.”

 

   혼자서 몇 걸음 바르게 간다 싶더니 금방 휘청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빠르게 달려가 고죠를 붙잡았다. 나 완전 잘 걷지. 그 모델보다 더 워킹실력 좋지. 눈가에 호를 그리며 웃는 게 아무리 봐도 만취했다. 착각이었나 보다.

 

   간신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드디어 문 앞으로 도착했다. 비밀번호를 누르던 중 옆집인 604호에 수북히 쌓인 이삿짐을 발견했다. 다나카 씨, 돈이 없으니까 여기서 뿌리를 박겠다고 했는데 인사도 없이 나가다니 섭섭하다. 종종 술도 같이 마실 만큼 나름 친했던 사이였다. 이게 현대 사회의 무정한 인간관계인가. 씁쓸함을 끌어안고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상사를 소파에 재울 수는 없어서 침실로 발길을 옮겼다. 에어컨도 없는 소파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자야한다니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침대에 던질 수 없어 천천히 그를 내려놓는데 육중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함께 시트로 떨어지고 말았다. 

 

   “팀장님!”

   “왜에...?”

   “잠깐 옆으로 조금만 가주세요. 네?”

 

   밀쳐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킁킁거리다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여기서 네 냄새가 나.”

 

   기분 좋다. 그가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몸을 덮는 무게감과 따뜻한 사람의 체온에 그제야 내가 고죠와 한 침대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

 

   ‘속눈썹 길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하얀 머리칼을 쓰다듬자 고죠의 눈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렸다. 손 사이를 부드럽게 스치는 머리칼도 매끈한 입술도 코끝에 닿는 그의 향기도 모두 내 감각을 자극해서 이성을 마비시킨다. 주인의 속도 모르고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힘겹게 그를 옆으로 밀쳐냈다. 작은 침대에 몸을 욱여넣은 게 귀엽게 보이기까지 한다. ...더위에 잠깐 미쳤나.

 

   담요를 덮고 쿠션에 머리를 뉘이며 눈을 감았다. 소파는 역시 불편하다. 맴맴맴. 매미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여름은 역시 힘들다.

*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옅은 베이지색의 벽지가 발린 익숙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날 술을 마셔 머릿속이 몽롱하다. 눈을 비비며 침대 맡에 걸터앉던 중 문득 나보다 취했던 상사가 떠올랐다. 어라. 분명 그를 침대에 눕혔던 것 같은데 왜 내가 여기에 있지. 꿈이었나. 하품을 길게 하던 중 문이 벌컥 열린다.

 

   “잠꾸러기 일어났어?”

 

   며칠 전 마트에서 특별히 산 앞치마에 그려진 귀여운 곰이 나보다 훨씬 넓은 가슴판에 늘어나 울상이 되어 내 심정을 대변한다.

 

   “어제 소파에서 잤던 것 같은데....”

   “소파에서 웅크려서 자고 있던 너를 내가 여기로 옮겼어.”

   “감사합니다.”

   “아침식사를 준비했는데 나와서 먹어.”

 

   작은 식탁에 음식이 한가득 올려졌다. 개중에는 내가 미리 만들어놓은 것을 데우기만 한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가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를 이용해 조리한 음식이었다. 이 남자 요리도 잘한다. 의외다. 직접 만든 된장국을 한 입 했을 때는 감탄하고 말았다. 별다른 조미료도 없을 터인데 고소하고 짭짤한 게 일품이다.

 

   “요리도 잘 하실 줄 몰랐어요.”

   “난 최강이니까.”

 

   오글거리고 오만한 말이지만 고죠 사토루라서 도리어 납득이 된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연어를 먹던 중 초인종이 울린다.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방문할 사람이 없다.

 

   “계신가요. 604호에 새로 입주한 사람입니다. 이사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 옆집 사람인가 봐요. 잠시 만나고 올게요.”

   “집 앞에 두고 가!”

 

   현관으로 가려는 나를 고죠가 붙잡아 놓다 못해 앞에 두고 가라며 외친다.

 

   “멋대로 대답하시면 어떡해요! 얼른 받기만 하고 올게요.”

   “모르는 사람을 멋대로 집에 들이면 안 된다는 거 몰라?”

   “집에 들이는 것도 아니고 인사만 하고 오는 것뿐이에요. 문전박대하는 거 정 없어 보여요.”

   “괜찮아. 정 없어도 돼. 아키사는 정이 너무 많아. 무시하고 밥 먹자. 자, 아 해봐.”

 

   입 안으로 소시지가 들어왔다. 오물오물 씹으며 그가 연어구이에 젓가락을 가져다 댔을 때 현관으로 뛰쳐나가 문을 열었다. 조금씩 열리는 문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도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키사가 바로 옆집이라니 난 운이 좋나 봐.”

   “게토... 게토 씨?”

   “스구루라고 불러도 돼. 앞으로 자주 만날 텐데 성으로 부르면 어색하잖니.”

 

   그가 내 옆집에 왔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돈이란 돈은 긁어모았을 사람이 어째서 이 허름한 아파트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토는 내 품에 이사 선물을 안겨주었다. 쇼핑백 안을 얼핏 살펴보니 수건과 과자 그리고 와인이 가득 담겨있다.

 

   “사인 받아도 돼요?”

 

   저번 주에 미처 받지 못해 내내 아쉬웠다.

 

   “당연하지. 아키사가 바란다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

   “안 돼. 그런 거 필요 없어. 선물 줬으면 가.”

 

   고죠 사토루가 우리 둘 사이에 끼워들었다. 거대한 벽이 눈앞에 우뚝 서니 게토의 털끝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아. 사토루. 무례한 짓은 하지 마라고 몇 번 말했잖니.”

   “무례한 짓? 다른 건 몰라도 먼저 선을 넘은 건 너야. 스구루.”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는 걸로 보아 단순히 모델과 고용인의 관계와는 멀었다. 멀뚱멀뚱 쇼핑백을 들고 있는 나를 뒤늦게 본 게토 스구루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친구사이라며 덧붙였다.

 

   “아무튼 아키사한테는 네 사인은 필요 없어. 가.”

   “아키사 정말 사인 필요 없니?”

   “......받고 싶은데.”

 

   나는 고죠의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사인도 사인이지만 혹시나 상사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진 않는다. 그러자 게토는 고죠를 솜씨 좋게 타일렀다. 몇 번의 설득에 고죠는 투덜거리며 비켜주었다. 심기 맞춰주기 참으로 힘든 상사다.

 

   “뭐라고 적어줄까.”

 

   연예인에게 사인을 받는 건 차음이라 적당한 문구가 떠오르지 않는다. 십 년이 넘는 연예인 짬밥인지 게토 스구루는 곧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랑하는 아키사에게’라고 무난한 문구를 적어서 건넸다.

 

   “와아! 가보로 간직할게요!”

 

   신나서 사인이 적힌 다이어리를 안아들자 고죠가 또 불만인지 앞을 막는다.

 

   “가보? 고작 이런 게 가보? 나도 사인해줄까? 쟤 사인보다 내 사인 더 좋아. 유급휴가 신청서나 연봉조정 신청서에 내 사인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이외에도 내 사인만 있으면 회사 하나쯤은....”

   “사토루.”

 

   귀찮은지 게토 스구루가 엄지로 제 이마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떼쓰는 남자는 인기가 없단다.”

 

   고죠의 어깨가 축 처진다. 비 맞은 강아지가 떠오른다.

 

   “...아키사 나 방금 별로였어?”

   “네.”

 

   단호하게 말하자 자신은 그렇게 질척질척한 부류의 남자가 아니라고 변명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옆집에서 왔어! 이사 선물인데 네가 좋아할 만한 거로만 챙겨왔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느 정도 익숙하냐면 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귀에 피가 나도록 듣는 목소리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문을 여니 백발의 남자가 허름한 아파트에는 어울리지 않은 고급 선글라스를 낀 채 쇼핑백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놀라서 입이 떡 벌어진 나를 보곤 손에 쇼핑백을 쥐여 준다. 사이즈는 어떻게 안 것인지 옷이며 디저트며 도저히 이사 선물로는 보이지 않은 것들이 수북하다. 당신 그렇게 귀찮은 남자는 아니라면서.

 

   상사가 급한 호출로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이웃의 유명 배우가 와서는 음식을 너무 많이 만들었으니 같이 먹자고 권유했다. 낡아 색이 누렇게 변한 벽지와 어울리지 않은 블랙 가구가 늘어선 집은 낫토에 고급스러운 와인을 곁들어 먹는 것처럼 부조화였다. 오래 지낼 곳은 아니라 벽지는 그대로 뒀다는 말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그려졌지만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 소바를 우물우물 먹는데 그가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부담스러워서 먹는 걸 멈추니 우물거리는 게 귀엽다나 뭐라나. 

 

   옆집 사람들이 너무 부담스러워요.

 

 

*

 

 

   평범하게 살아가던 나의 일상에 비일상이 성큼 들어왔다.

 

   도대체 왜 당신들이 이런 곳에서 사냐는 물음에 게토는 근방에 일이 있어 임시거처를 구한 것뿐이며 고죠 사토루는 친한 친우와 자주 만나기 위함이라는데 석연치 않았다. 캐묻고는 싶어도 더는 이들과 사적으로 엮이기 꺼려졌다. 나와 그들은 사는 세계가 다르다.

 

   지금까지 내 인생은 보잘것없이 하찮았으며 출가를 한 이후에 간신히 정상궤도에 올라 봐줄 만한 정도가 되었다. 어렵게 얻어낸 평범함이라는 걸 절대로 깨고 싶지 않다. 설령 그게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막연히 변화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 비일상들은 그런 나의 속도 모르고 하루가 멀다고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고 이름을 불렀다. 같이 밥을 먹자며 손을 잡아끌고 함께 게임을 하자며 살갑게 다가온다. 이대로 저 둘이 주는 행복을 끌어안고 잠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젠가 이곳을 떠나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아갈 터이다. 저 둘에게 나는 그저 우연히 옆집에 살았던 여자에 불과하고, 나만 영원히 가슴 속에 묻고 싶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쓸쓸할 게 분명하다. 징크스대로 최악의 여름이 되어버린다.

   “아! 또 졌어!”

 

   분해서 들고 있던 기기를 내던지려다가 얼마되지 않은 이성이 날 말렸다. 참고로 이 기계의 주인은 고죠 사토루다.

 

   “아키사는 게임을 너무 못해.”

 

   승자인 고죠 사토루가 브이를 하며 내 어깨를 감싸 안는다. 10판 이상을 했는데 내내 3등이었고, 영광의 1등의 자리는 다른 두 명이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이상하긴. 아까 네 기기가 이상한 것 같다고 해서 내 거랑 바꿔줬는데도 꼴등이었고, 앉은 자리의 터가 안 좋다고 해서 이동했는데도 똑같았잖니.”

   “그래도 어떻게 10번 전부 다 질 수가 있어요?”

   “그건 아키사가 너무 못하기 때문이지. 슬슬 인정할 때 되지 않았어?”

 

   볼이 화끈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추하다. 게임 기기가 이상하다느니 앉은 자리의 기운이 좋지 않다느니 패자의 구차한 변명이다. 얼굴을 들지 못하고 푹 숙이자 고죠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이제 뭘 시키지.”

 

악동처럼 장난기가 가득 찬 얼굴에 뒷걸음질 쳤지만, 곧바로 막혔다. 게토 스구루도 합세해서 나를 양옆에서 압박해온다. 게임에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는데, 내가 초보자인 걸 고려해 여러 편의를 봐줬음에도 결국 처참하게 졌다.

 

“뭐 시키실 건데요.”

 

두 남자는 일제히 짓궂게 웃었다. 십년지기라더니 정말 끼리끼리다.

 

“뭐가 좋을까. 아키사가 곤란해할 만한 게 뭐가 있지.”

“저 돈 별로 없어요. 바빠서 시간도 없고요. 금전적인 거나 과한 노동력을 요구하는 건 사절이에요.”

 

가질 거 다 가진 사람들이 귀찮은 요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매일 내 어깨를 주무르게 할까. 요즘 어깨가 결려서 문제야.”

“그것도 좋네. 사토루. 아니면 매일 아침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건 어때.”

“아키사는 손재주가 좋지. 저번에 만들어준 밀푀유나베 맛있었어.”

“매일은 무리예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과한 노동력을 요구하는 건 사절이라고 했는데 귓등으로 들었나 보다. 오랜 협상 끝에 일주일간 저녁을 만들어주는 걸로 합의 봤다. 재료비는 둘이 지불하기로 했다. 다행이나? 뭔가 둘의 페이스에 휘말린 기분이다.

 

   머리를 쥐어 싸며 메뉴를 고민하던 나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또 저 눈빛이다. 왜 당신들은 이따금 그런 애달픈 눈초리로 나를 보는지 모르겠다.

 

 

*

 

 

   지독한 악몽이다. 그것은 매년 여름마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더위가 최고치를 찍을 즈음에 온전히 나를 덮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여름을 막연히 싫어하고 불길한 존재로 여기게 된 건 이 반복되는 꿈 때문이다.

 

   헉!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잠에서 깨어난 나는 숨을 골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으로 흥건하다. 딱딱하게 경직된 몸을 이끌며 일어나보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서랍장 위의 유리잔이 떨어져 조각이 바닥에 흩어졌으나 치울 겨를이 없었다. 현실처럼 선명한 꿈에 허구라는 걸 앎에도 가슴이 먹먹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 문을 열자 무더운 여름의 열기가 훅 들이닥친다. 역시 이 계절은 싫다.

 

   꿈속에서의 나는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게 이상한 것을 보았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두려워하여 기분 나쁜 것을 내쳐버리듯이 다른 이에게 입양을 보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간 나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포기해야만 했던 어린 소녀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일한 이해자였던 친구가 탈주했다. 이 모든 것은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던 계절에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개꿈을 일생을 걸쳐서 꾸는 건지. 우습게도 나는 이 꿈을 꿀 때마다 홀로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웠다. 내가 이렇게 감상적인 사람이었던가 생각해보면 딱히 그러지도 않다.

 

   “아키사.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나와 봤는데 괜찮니?”

 

   옆 발코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 방향은 604호다. 자다가 막 깼는지 항상 단정하게 묶여있던 머리칼이 풀어헤쳐졌다.

 

   “...우니?”

 

   그를 보자 봇물이 터진 것처럼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게토 스구루가 당황하며 손을 뻗어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닿지 않는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내게 뒤로 물러서라고 손짓한다. 두 발자국 뒷걸음질 친 순간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가고는 갑자기 우리 집 발코니로 뛰어넘어 왔다.

 

   “위험하게! 무슨 짓이에요!”

 

   값싼 아파트가 으레 그렇듯이 사생활의 보호가 되지 않을 만큼 좁은 간격이나 그렇다고 쉬이 뛰어갈 생각을 할만한 넓이는 아니었다. 하물며 6층이다. 떨어지면 못 해도 반신불수가 될 높이를 넘어오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안전하게 착지했잖니.”

   “그래도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노력했다면서요. 고작 이런 걸로 목숨 버리고 싶으세요?”

 

   눈물 자국이 남은 볼을 소매로 훔쳐준다.

 

   “괜찮아. 만났어.”

   “...정말요?”

   “응. 최근에 정말 운이 좋게도 만났어.”

   “만났으면 더 조심했어야죠. 간신히 만났는데 이렇게 헤어지면 슬프잖아요.”

 

   그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키사는 내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

   “타인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런 정론을 말하는 게 아니야. 정말 ‘내’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

   “네. 몸 건강히 그렇게 다정한 채로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첫 만남 때부터 나는 그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분명 만난 적이 없는 사이일 터인데 어째서 그를 보면 가슴이 아플까. 당신이 행복하게, 진심으로 웃으며 오래 살았으면 한다. 고개를 끄덕이자 게토가 나를 꽉 안아주었다. 따스한 온기에 멈췄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왜 울었니?”

   “악몽을 꿨거든요.”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왔던 악몽을 모조리 말했다. 지겨울 만도 한데 차근차근 들어주었다.

 

   “있잖아. 아키사. 반복되는 악몽은 전생의 기억이래.”

   “전생이요?”

   “이전 생이 사무치도록 한이 서려서 다시 태어나도 잊을 수 없는 거래.”

 

   황당한 발언이었으나 진지해서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정말 전생의 기억인 걸까. 만약 그게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전생의 저는 불행했군요.”

 

   절대로 잊을 수가 없어서 영혼에 새겨서까지 환생했나 보다. 그 자조적인 미소에 게토 스구루는 당사자도 아니면서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미안해.”

 

   내 손을 꽉 잡는다. 고개를 푹 숙여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왜 사과해요?”

   “해야만 하니까. 하지만, 아키사. 그게 내 최선이었어. 선택에 후회하지 않아. 그렇지만 그 선택이 너를 힘들게 했다는 건 변하지 않은 사실이겠지.”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멍하니 맞잡은 손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누군가가 내가 힘들 때면 이렇게 손을 잡아줬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토록 더운 여름에 떠났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현실과 꿈의 아릿한 경계에 이 남자가 서 있다. 이 가슴의 울렁거림은 지금까지 몇 번 반복되었다. 우선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이에이리 쇼코를 마주했을 때 처음으로 이유 없는 가슴앓이를 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우타히메 언니를 만났을 때도 회사에 입사해 고죠와 이지치 그리고 나나미를 보았을 때도 속이 뒤틀리는 듯한 슬픔을 겪었다.

 

   “울지 마.”

 

   게토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말없이 그의 가슴에 기댔다. 더운 열기마저 잊게 해주는 따스함에 녹아내린다.

 

   “뭐야. 왜 나만 안 들여보내 줘? 왜 둘이 붙어있어? 그거 약속 위반이야. 스구루.”

 

   분위기와 맞지 않게 심통 난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게토를 밀치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602호 거주자이자 상사인 고죠 사토루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이 좋다고 자랑하고 다녔던 건 사실인지 어둠 속에서도 눈물 자국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아키사 울어? 쟤가 널 울렸어?”

   “...그냥 울었어요.”

   “그냥이 어디에 있어. 지금 바로 갈 테니까 나도 들여보내 줘.”

   “제가 들여보냈다기보다는 게토 씨가 위험하게 뛰어온 거라고요.”

   “그래? 그렇게 막 들어가도 화 안 내는 거야?”

 

   말릴 새도 없이 게토만큼이나 깔끔한 동작으로 난간을 뛰어넘어 발코니로 들어왔다. 옆집 사람들이 도둑에 훌륭한 재능이 있다. 고죠는 성큼성큼 다가와 조심스럽게 나를 살폈다. 신중하게 나를 살펴보는 그의 진중한 얼굴에 안심된다. 허구한 날 최강이라고 말했던 게 정말 세뇌가 되었나 보다. 저 경박한 상사가 든든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것 같다. 웃음이 났다.

 

   “울다가 웃으며 엉덩이에 뿔난대. 확인해 봐.”

   “다행히 뿔 안 났네요.”

 

   나는 울며 웃었다.

 

   방으로 들어간 우리는 영화를 보았다. 사실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대강 전생의 인연을 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로맨스 영화였다. 어느덧 클라이맥스에 올랐다. 연인이 입을 맞추며 해후를 즐긴다.

 

   “만약 전생이라는 게 있다면, 과거의 인연들을 만나보고 싶어?”

 

   전생이라. 비현실적인 데에 쓸데없이 머리를 쓰지 말자는 주의인 나에겐 어려운 질문이다.

 

   “팀장님은요?”

   “난 만날 거야. 수중에 있는 모든 권력과 돈이 탕진되더라도 상관없어.”

   “낭만적이시네요.”

   원래 낭만을 아는 남자가 멋진 법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답하는 팀장님을 뒤로 하고 게토 스구루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고죠가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깍지를 낀다.

 

   “나도 만날 거야. 어떻게서든 찾아서 만나고 싶어.”

   “아키사는 어떻게 하고 싶어?”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잘 모르겠어요.”

   “왜?”

   “현생이 힘들어서 전생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요.”

 

   심장 한구석이 저리다.

 

   “만약 그 사람들이 네게 찾아와도?”

   “네. 전 이제야 생활이 안정되었어요. 간신히 찾은 평화인데, 제 일상을 뒤흔들만한 변화가 오는 게 싫어요.”

 

   고생하는 건 도박중독인 부모 밑에서 자랐던 걸로 충분하다. 빚쟁이에 시달리며 이번에는 집구석에서 어떤 값비싼 물건이 팔려 가는지 상상해 보는 건 어린시절 나의 자조적인 놀이였다. 무엇보다 전생의 인연이라고 찾아오는 이가 진실인지 미치광이인지 빚쟁이인지 구분할 방법도 없다. 내게 그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은 이상 말이다.

 

   “하하. 진지해지지 마세요. 어차피 그런 건 없잖아요?”

   “...다른 영화 볼까?”

 

   게토가 영화를 넘겼다. 딱 결말만 남겨두고 있었는데 찝찝하다. 저런 상업 영화의 결말이란 대부분 고난이 있었으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진부한 끝이겠지만 뒷맛이 쓰다. 그 뒤로 무난한 영화가 틀어졌다. 분위기가 어색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나름 재미있었던 것 같다. 새벽은 깊어가고 졸음이 찾아왔다.

 

 

*

 

 

   눈을 뜨자 해가 뜨려는지 어둠 속에서도 어슴푸레 주변의 윤곽이 보였다. 생각보다 오래 잠들었다. 도중부터 꿈나라로 빠졌던 나와 달리 게토와 고죠는 가벼운 다과를 먹으며 작은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이 피곤했나 봐. 요즘 회사에서 너무 괴롭힌 거 아니야?”

 

   게토가 흐트러진 담요를 가슴께까지 덮어주었다.

   “그럴 리가 절대 없거든. 점심마다 맛있는 거 먹이고 야근도 빼주고 복잡한 건 이지치한테 전부 넘겼어.”

   “그래? 그러면 고민이 있는 거려나. 걱정되네. 아니면 상사가 바로 옆집에 있어서 신경이 곤두선 거 아니야? 슬슬 이사 좀 가지.”

 

   이지치의 얼굴이 날이 지날수록 음영이 져간다 싶더니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기력 회복에 좋은 보양식이라도 사 들고 가야겠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얼른 돌아오라고 난리야. 윗대가리는 어딜 가든 귀찮네.”

 

   졸음이 다 가시지 않았기에 나는 눈을 감고 계속 자는 척을 했다. 조금 더 빈둥거리고 싶다. 고죠는 언짢은지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논다.

 

   “이대로 그냥 확 데려가 버릴까.”

   “사토루.”

   “아니, 그렇잖아. 여기 너무 허름해서 싫어. 채광도 구리고 방음도 안 돼.”

 

   다시 단잠에 빠져들려는 중 불길한 말이 들린다. 데려가다니? 납치? 아니면 같이 여행이라고 가자는 건가.

 

   “덕분에 아키사가 뭘 하는지 잘 들렸잖아. 외출할 때마다 꼬박꼬박 나왔던 주제에.”

   “누가 보면 나만 그런 줄 알겠다? 스구루도 일부러 우연인 척 나와서 쇼핑도 자주 했잖아. 어디 가는지 동선 체크하는 거 봤어.”

   “걱정돼서 그런 거야.”

   “아, 맞다. 처음 만났을 때 이상한 놈들을 봤다고 했지. 위험했어.”

 

   TV 소리도 꺼진 고요한 방 안에서 섬뜩한 대화가 오고 간다.

 

   “이번에도 부모를 잘 못 만난 거지. 도박중독이라니 웃음만 나와.”

 

   고죠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힘이 얼마나 강한지 으스러질 듯하다. 느린 박자로 내 몸을 토닥여주고 있던 게토가 허리를 끌어당겼다. 뒤에서 고죠의 불평한다. 야, 선 넘지 말라니까. 이전에도 몇 번 선을 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들은 날 사이에 두고 뭘 하려는 거지? 고민하는 사이 귓가에 뜨뜻한 숨결이 닿는다.

 

   “그런데 아키사, 아까부터 왜 자는 척하고 있어?”

 

   떨어지는 나긋나긋한 음성에 심장이 터질 듯하다.

 

 

*

 

 

   조금, 아니 매우 안일한 생각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광고에서 얼굴을 봤을 유명 연예인과 나라를 주름잡는 대기업 후계자가 평범한 사람과 엮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거기에 굳이 그런 사람들이 이런 싸구려 아파트에 이사를 오고, 하필이면 내 양 옆집이라는 건 더 비현실적이다. 하물며 게토 스구루는 말한 적도 없는 이름을 불렀고, 부끄러워서 취중에도 대화 소재로 절대로 꺼내지 않은 도박중독인 아버지를 고죠 사토루가 알고 있는 건 수상하다.

 

   외면하고 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씩 맞춰진다. 이 사람들은 사전에 나를 알고 있었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성장통을 겪었던 어린 날 삐걱거리는 현관을 부수고 들어왔던 빚쟁이들을 또렷이 기억한다. 나의 청소년 시절을 산산조각 냈던 뜨거운 욕망의 열기는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설마 아버지라는 작자가 딸까지 팔아치운 건가. 아니면 더는 아버지에게 받아낼 방법이 없으니 딸에게까지 찾아온 건가.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혼자 설레하고 좋아하다니. 이런 건 도박을 끊었다고 돈을 빌려달라던 아버지의 말을 믿은 것만큼이나 바보 같은 짓이었다. 어리석음에 비웃으며 나는 이불 속에서 동그랗게 몸을 웅크렸다.

 

   집에 틀어박힌 지 벌써 일주일째다. 오늘도 옆집 이웃들은 문을 두드렸다. 점심을 만들어봤다느니 걱정된다느니 번지르르한 말만 늘어놓는다. 혹시 몰라 이에이리 쇼코에게 현재 상황을 문자로 보냈다.

 

   “아키사.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괜찮다는 연락이라도 줘. 제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절절한 목소리도 나의 귀에는 사악하게 들릴 뿐이다. 서로 귀찮은 일은 만들기 싫으니 제 발로 나오라는 경고임이 분명하다.

 

   여름은 역시 싫다. 피부가 타들어 가는 더위도 견디기 힘들고, 매번 반복되는 악몽도 괴로우며, 기다렸다는 듯이 안 좋은 일들이 이 계절에만 일어나는 것도 모조리 최악이다. 전생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여름이라는 계절에 갇혀있다. 

 

   눈을 억지로 감았다. 걱정과는 달리 금세 잠에 빠져든다. 나는 아주 길고 긴 꿈을 꾸었다. 잊고 있었던, 정확히는 무의식이 거부했던 이야기들이 불쑥 다가왔다. 마치 매일 문을 두드렸던 이웃들처럼.

 

 

*

 

 

   이에이리 쇼코는 담배를 문 채로 며칠 전 받았던 메시지를 다시 읽어내렸다. 오랜 친구로부터 온 문자는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했고 필사적이다. 한숨을 내쉬자 뿌연 연기가 공중에 퍼진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구나.”

“도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근처 바닷가에 모인 세 명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 가를 논의하기 위한 대책위원회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끌려 나온 이에이리는 사건의 원흉인 둘을 응시했다.

 

   “조심하라고 했잖아. 세상 무서울 게 없는 너희는 절대로 이해 못 하겠지만 보통 그런 식으로 다가가면 대부분 여자는 놀라.”

   “이렇게 잘생겼는데?”

   “다정하게 대해줬어.”

 

   고죠와 게토가 한마디씩 구태여 덧붙인다.

 

   “잘생기고 다정하고 문제가 아니야. 그 얼굴들을 보아하니 설명해줘도 입만 아프겠어.”

 

   전생과 현생을 합쳐 피라미드의 꼭짓점이었던 저 둘이 약자들의 공포를 이해할 리가 없다. 특히나 아키사는 이번 생에 빚쟁이에게 시달린 전적이 있다. 지금이야 부모에게서 온전히 독립해 한결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범인보다 더 민감하게 외부자극을 받아들이는 건 그녀의 지난 인생이 강요한 삶의 방식이었다.

 

   게토와 고죠는 불안해졌다. 함께 고전을 다녔던 동급생은 다른 이들보다 더 애틋할 수밖에 없었고,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을 때 어떻게서든 찾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게토는 배우가 됐고 고죠는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썩은 귤을 상대하며 후계자를 자청했다. 오랜 노력 끝에 그들은 과거의 연과 재회했다. 대부분 기억이 있었지만 아키사처럼 떠올리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후자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전생의 사람들을 만나면 천천히 기억을 되찾았다.

 

   하지만 아키사는 그 ‘대부분’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자신들과 부대끼며 지내다 보면 금방 떠올릴 거라 믿었는데, 아무래도 아키사에게 전생은 절대로 떠올리기 싫은 악몽이었나 보다. 고죠와 게토는 후회했다.

 

   이대로 아키사의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대로 아키사가 우리와 만나는 걸 싫어하게 된다면 어떡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평범하게 다가갈걸. 기억하지 않아도 이번 생에서 새롭게 인연을 만들어나가면 됐다. 이에이리 쇼코처럼 말이다.

 

   “아키사?”

 

   누군가를 발견한 게토가 홀린 듯이 말했다. 저 먼 해변에서 익숙한 인영이 걸어온다. 작열하는 태양에 해변이 뜨겁게 달아올랐는데도, 그녀는 밝은 얼굴이었다. 쏴아아. 청량한 파도 소리와 동시에 아키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아.”

   “넌 더위를 많이 타니까.”

 

   가을이 오려나. 더운 열기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대로 가을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따스한 푸른 봄이 도래한다.

 

   “여름에는 항상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집에 빚쟁이들이 몰려 들어와 값이 될만한 물건은 전부 가져갔고, 에어컨도 못 튼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온 집안을 뒤집어놓는 아버지를 무력하게 바라봤어. 간신히 집에서 나와서 살아가던 어느 날, 이번에는 정말 새 삶을 살 거라고 돈을 요구하는 아버지께 모아둔 걸 전부 드렸던 적도 있네. 결과는 여느 때와 같았지만.”

 

   담담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브리핑하는 아나운서처럼 제삼자의 이야기를 하듯 감정이 실려있지 않다.

 

   “그리고 내가 비주술사인 부모님에게 버려진 것도, 아마나이 리코가 죽은 것도, 게토 네가 떠난 것도 전부 여름이네. 이 계절과는 참 악연이야.”

 

   일제히 세 쌍의 눈들이 커졌다.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인연이라 그런지 행동거지가 닮았다. 아키사는 나지막히 웃었다. 게토와 고죠는 그녀가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애초에 둘에게 딱딱하게 말을 높이는 아키사가 익숙하지 않은 쪽이었다.

 

   “도와줘. 내가 더위를, 여름을 이겨낼 수 있도록. 내 시간은 여기에 멈춰있어. 혼자서는 무리야.”

 

   나가스기 아키사는 손을 내밀었다. 그 위로 세 명의 손이 층층이 쌓였다. 이거 좀 웃기지 않아? 시답지 않은 농담을 지껄이며 그들은 웃었다.

 

   잃어버렸던 푸른 봄. 웃기게도 한 번의 생을 넘고 소년과 소녀라고 절대로 부를 수 없는 나이에 되찾은 청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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